타이어 회사가 식당의 등급을 매기게 된 사연
흑백 요리사의 포스, 그리고 ‘미슐랭’이라는 이름
흑백 톤의 사진 속 요리사.
칼을 든 손에 굳은살이 배어 있고, 이마엔 땀이 맺혀 있다.
진지한 눈빛으로 조리대를 바라보는 그의 뒤로는 흐릿한 조명과 낡은 주방이 비친다.
사진 아래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이 요리는 하루에 단 6그릇만 나옵니다.”
“그는 이 소스를 위해 토마토만 3년 동안 볶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진을 보면 자동으로 ‘미슐랭 셰프구나’ 하고 떠올린다.
그런데… 그 미슐랭이 타이어 회사라는 사실, 알고 있었을까?
미슐랭, 요리사가 아닌 타이어 장인?
미슐랭(Michelin)은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에 본사를 둔 자동차 타이어 제조사다.
흰색 타이어 인형처럼 생긴 캐릭터 ‘비벤덤(Bibendum)’도 이 회사의 마스코트다.
(미슐랭 맨 캐릭터 이미지, 흰색 타이어 인형이 웃고 있는 모습)
그런데 왜 이 타이어 회사가
‘세계 최고의 맛집 평가 가이드’를 만들었을까?
타이어를 더 빨리 닳게 만드는 법
1900년, 미슐랭 형제는 질문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동차를 더 자주, 더 멀리 타게 만들까?”
당시 타이어는 잘 닳지 않았고, 자동차도 귀했다.
그래서 미슐랭은 생각했다.
차를 몰고 떠나고 싶게 만드는 ‘이유’, ‘목적지’를 제공하자.
운전자 안내서에서 시작된 ‘미슐랭 가이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미슐랭 가이드’다.
정비소, 주유소, 숙소, 맛집 정보를 담은 운전자용 안내서였고,
초기엔 무료로 배포됐다.
스마트폰도 지도도 없던 시절, 이 책은 엄청난 반응을 얻는다.
사람들은 결국 맛집을 원했다
특히 식당 정보가 큰 인기를 끌자,
미슐랭은 전문적인 식당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다.
익명 평가원인 ‘인스펙터(inspector)’가 등장했고,
1926년에는 별 1개 시스템,
1931년에는 별 3개 체계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193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 정해진다.
- ★ : 흥미로운 곳
- ★★ : 돌아서 갈 가치가 있는 곳
- ★★★ : 여행할 가치가 있는 식당
별 셋짜리 맛집의 진짜 의미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별의 뜻이다.
단순히 맛있다는 뜻이 아니다.
차를 타고 일부러 찾아갈 가치가 있는 장소라는 의미다.
즉, 별 셋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이어가 닳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특별한 경험.”
한국에도 미슐랭이 찾아왔다
대한민국은 2011년, 여행 정보를 담은 ‘그린 가이드’에 먼저 등장했고,
2016년엔 마침내 식당 평가를 다룬 ‘레드 가이드’에 포함됐다.
<2017 미슐랭 가이드 서울>은
아시아에서 4번째, 전 세계에서 28번째로 발간된 가이드였다.
별점을 받은 식당 24곳 중 13곳이 한식당이었으며,
가성비 좋은 맛집 ‘빕 구르망’ 36곳도 포함되어 총 140여 곳이 소개됐다.
(2017 미슐랭 서울판 표지 혹은 서울 미슐랭 식당 이미지)
정리하며: 미슐랭, 타이어 회사를 넘어 경험을 판다
미슐랭은 ‘맛’만을 판 게 아니다.
그들은 이동하고 싶게 만드는 ‘욕망’과 ‘이유’를 판 브랜드였다.
흑백 사진 속 요리사의 근엄한 손끝에는
120년 전 타이어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다음에 미슐랭 맛집을 예약하게 된다면,
이 질문을 한 번 떠올려 보자.
“나는 이 집을 위해 얼마나 먼 길을 달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