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맨 만큼 내 땅
[졸업작품 절망편] 기획자로 갈아탐 본문
사실 난 그닥 재능이 있던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성은 있었다.
근성있게 노력해서 디자인 대학에 붙었고. 디자인 대학에 입학해서는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았다.
왜냐면 난 재능은 없었지만 적성은 맞았으니까.
재능이 없다면서 무슨 적성이냐고?
뭐,... 적성이랄게 별거있나.
즐거우면 그게 적성이지.
영어공부는 밤새워 하지 못하는 내가 디자인은 사흘 밤낮을 새워 즐겁게 할수있다면 그건 적성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디자인을 정말 사랑했다. 하루 종일 폰트 하나, 색감 하나에 집착했고,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작업이 완벽해질 때까지 수십 번이고 다시 손을 대며 디자인을 다듬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즐거웠다.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노트북으로 달려갔다. 디자인에 미쳤던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대학생 시절 내 별명이 '피 대신 카페인이 흐르는 놈' 일 정도.
인생을 살며 성실하게 몰입해 할 수 있는 일을 인생에서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기에 감사 한 마음이 컸다. 난 그때 정말 행복했으니까. 무엇하나 이룰때마다 다른 분야에선 얻을 수 없던 성취감이 너무너무너무 커서 행복했다.
때문에 온갖 대외활동, 봉사활동, 공모전을 섭렵하며
5년 뒤, 10년 뒤의 나를 상상하면 난 언제나 디자인 툴을 붙잡고 사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상상했다.
그랬던 나였기에
...조금은 오만하기도 했다.(반성한다)
디자인에 열정이 없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디자인 대학까지 와놓고선
슬럼프에 빠졌다는 이유로 손을 놓아버리는 사람들,
팀 프로젝트에서 대충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했다.
‘근성이면 안되는 게 없는데. 왜 노력을 안하고 슬럼프 핑계만 대지?’
그들을 한심히 본 적도 있다.
바보같이, 그사람의 힘듦을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상대를 재단하던 어린시절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거진 4년) 오만하게 살다가 슬럼프를 맞이했다. 내 오만이 끝나던 날이었다.
내 오만에 브레이크를 건 슬럼프의 시작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바로
작년 3월 1일이었다.
2. 나의 디자인 슬럼프
그러니까, 내가 졸업작품을 시작하던 학기.
그 사람을 만나고 태어나 처음으로...디자인이 미치도록 재미가 없었다.
졸업작품을 하는 내내 가만히앉아 디자인을 하다가도 울컥울컥 올라오는 노트북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는 게 더 고역이었다. 좋아했다면서 갑자기 왜 그렇게 됐냐고?
심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물리적인 브레이크였으니까.
그건 내 문제도, 나의 실력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 문제였다.
Q. 졸업작품이 팀플이었냐고?
A. (피식) 아니. 차라리 또래였다면 나았겠지.
Q. 그럼 누가 범인인가요?
A. 범인은 바로....
교수님
나는 20학번이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소리냐면, 그러니까 코로나 학번이라는 거다.
입학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져 장장 3년을 화상 수업으로 학교를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의 사정을 알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처음 통학하던 3학년 때 그 악명 높던 교수님은 안식년을 다녀오셨었다. 그러니 알 길이 없었다.
그 교수님이....
어떤 악명을 가진 사람인지.
그렇게 난 아무것도 모른 채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난 졸업 작품을 하며 생전 처음 배운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아무 이유 없이 미움받는다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라던가.
누군가에게 내 열정이 한낱 ‘꼴깝’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라던가.
사람이 사람을 사람들 다보는 앞에 장장40여분동안 세워두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비난하는 기인열전이 가능하다는 점이라던가...
아, 그리고 또, 사람이 사람을 제 교수실에 불러놓고
창문도 안열고 담배 연기를 얼굴에 내뿜는 무례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교육자라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적절한 대안도 없이.
"뭔 헛소리야?" 한마디로 8개월 동안 공들인 기획을 엎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도.
그뿐인가.
아침에 머리를 감고 화장하고 왔다고 화장할 시간이 있냐는 비난을 받고
얼굴에 다크서클이 안 보인다고 넌 이래서 안 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피드백 받으라며 개인톡으로 호출당하면 늘상 새벽 1,2시였고,
하루에도 수도 없이 오는 단톡 카톡에 바로바로 장문으로 답장을 안 하면 수업 시간 내내 눈치를 봐야 했다.
난 소설이나 만화속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는데.
현실 고증이었음을 배울 수 있었다.
수업을 들으러 갈 때면 숨이 막혔다. 아니, 쉬어지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 전,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목이 조여왔다.
심장이 뛰는데, 가슴이 아니라 목구멍에서 고동치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처음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차가 조금만 더 빨리 오면, 내가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오늘 수업을 안 들어도 될까.
그게 위험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그 순간에는 그게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때면 저 운전자 분은 무슨 잘못이라고. 지나가는 행인 분들은 무슨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참아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내 졸업 작품에는 정이 붙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정을 붙일 기력조차 없었다. 디자인에 대한 열정은 말라버렸고, 내 영혼은 탈진해버렸다. 그렇게 애정했던 디자인이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빈말이 아니다. 정말,
물리적으로 디자인 실력이 퇴화했다.
모니터를 켜도, 그냥 하얀 도화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빈 화면을 보면 자동으로 채워나갈 도형과 텍스트, 색상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떠올랐는데, 마치 물감이 마른 붓처럼 예전엔 쉽게 떠오르는 것들이 사라졌다. 쌓아온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
슬럼프 극복
졸업전시가 끝난 뒤, 한 달 동안은 아무리 자도 피곤했다. 식사도, 휴식도, 모든 게 힘들었다. 핸드폰조차 들기 어려워 그저 잠만 잤다. 꿈에서도 졸업 작품이 떠올라 끙끙 앓았고, 그런 나를-,
어머니가 흔들어 깨웠다.
아버지는 몸보신을 해야 한다며 억지로 식탁에 앉혀 밥을 차려주셨다.
오랜 소꿉친구는 체력이 약해진 거라며 헬스장으로 끌고 갔고, 저녁마다 산책하자며 불러댔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망가진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 덕분에 다시 일어나더라.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건 축복이다. 동시에, 그것은 증명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는 건, 나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는 뜻일 테니까. 잘 살아왔다는 증거이고, 그러니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된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손에 등을 떠밀려 장장 한 달 여만에 겨우 몸은 회복했다.
그렇게 강제 재활에 성공해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문제는 있었다. 디자인실력이 두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난 위기감을 느꼈다. 취업을 해야 했으니까. 이 나이 먹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언제까지 기댈 순 없었다.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하는데, 디자인이 안되니 비상사태였다. 최소한 하반기에는 취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다시 디자인을 해보려 했지만, 손이 도무지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디자인은 조금만 더 쉬기로 했다. 당장 포폴을 만드는 걸 미루고 토익 학원에 등록하고,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진로에 대한 고민, 새로운 발견
'이러다 평생 디자인을 못 하면 어떡하지?
토익이랑 자격증을 따고와서도 디자인이 안되면, 그땐 정말 어떡하지?'
그 답답함 속에서 아주 작은 목표 하나를 세웠다.
-다이어리 제작
바로 다이어리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그냥 나를 위한 다이어리. 시간이 엉망이 되어버린 만큼, 다시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기 위한 용도였다. 선을 긋고 달력을 배치하는 정도의 간단한 작업이니, 디자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참고 양식을 따라 인쇄소에 맡기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도전해보자 싶었다. 조심스럽게 다시 디자인 툴을 켜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근데 한심하게도 그것조차 버거웠다.
그렇게 끙끙 앓다가, 일러스트 화면을 끄고 워드를 켰다. 어차피 디자인도 못하고 빈 화면만 켜놓을 거라면 다이어리 기획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취지였다. 기획이 완벽하면 디자인은 더 수월할테니까. 그렇게 다이어리 기획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이어리 관련 영상과 자료, 시간 관리 논문까지 뒤져 가며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렇게 두 달이 걸려 완성한 다이어리를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왜 나는 디자인만이 내 길이라고 믿어왔을까?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잖아"
새로운 도전_기획
대학 시절 내내 디자인을 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항상 선행되었던 건 언제나 '기획'이었다. 기획이 없으면 어떠한 디자인도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의 전공학과는 흔히 아는 시각디자인 학과 가 아니었다. 커뮤니케이션 학과였다. 같은 말 아냐? 라고 생각할수있겠으나 아니, 다르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학과에서 내가 배운 디자인은 단순한 미적 작업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시각적으로 편리하게 만드는 학문이었다.
-
디자인의 핵심은 '설계'이다.
설계는 곧 기획이다.
내가 만든 다이어리도 디자인보다 기획이 먼저였듯이.
돌아보니, 내가 해온 모든 디자인 작업 뒤에는 항상 철저한 기획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의 작업 반추
1. 아마추어 작가들을 위한 웹소설 기획 보조어플 : 스토피아
-대학 과제로 진행했던 앱 디자인 수업에서는 출시 직전 단계까지 모든 기획을 맡았다. 메뉴 트리부터 화면 설계도, 설문조사, 인터뷰까지 직접 진행하며 철저히 준비했다.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결국 기획 가이드북만 70페이지를 넘겼다.
2. 에버랜드 사업제안서
: 에버랜드 마케터스로 활동하며 사업 제안을 발표했던 경험도 있다. 여섯 달 동안 준비한 제안서는 PPT 100장이 넘을 정도로 방대했다.
3. 십시일밥 리브랜딩 및 사업 위한 제안
-봉사단체에서는 디자인팀 팀장으로 일하며 자금 관리팀, 생필품 사업팀과 협업해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주도했던 경험도 많다.
그간 나는 정말 디자인을 좋아했다.
그런데 몰랐다. 내가 디자인만큼이나 기획에도 몰입해 살아왔다는 걸.
디자인만큼이나 기획을 즐겼다는 걸.
그걸 깨닫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디자인에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기에, 그걸 놓는다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놓아도 된다.
나는 다짐했다.
"그래, 기획자로 나아가자.
디자인을 이해하는 기획자라면, 더 강한 무기가 될 테니까"
그렇게 난 새로운 이름의 늘 해온 도전을 다시 시작했다.
디자이너에서, 기획자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난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길을 만든다.
그러니 이건 이름만 바뀐 늘 하던 도전이다.
다만 조금 더 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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